시나리오 총평 (김세훈)
총 251팀이 제출한 1차 과제물에는 ‘우리 동네’와 ‘청와대’라는 사뭇 이질적인 성격을 엮어보고자 하는 참가자들의 지적 탐색과 고민이 잘 드러났다. 아마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청와대 이전 계획만 해도 만만치 않은 작업인데, 우리 일상적 삶의 영역 한가운데 국가권력의 핵심 기관을 왜, 그리고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라는 논리와 근거를 글로 써 내려가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런데도 상당수의 참가자가 공모전 취지를 잘 파악하고 정면 돌파했다는 점에서 박수갈채를 보낸다. 차이는 있지만, 청와대를 소통과 참여의 동네 거점으로 제시한 안의 큰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현재 청와대의 입지와 공간적 구조는 국가 운영에 시민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정책결정자는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고, ‘그들만의 리그’를 통해 임명된 공무원들은 일에 치여 안타깝게도 시민주권 실천을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이제 청와대를 시민사회의 품속에 제대로 복원하자. 바로 여기에 ‘동네’의 잠재력이 있다. 동네는 친숙하고 편안한 곳이다. 누구나 불편하거나 개선될 일을 이야기할 수 있고 누구든 여기에 공감하거나 또 다른 의견을 낼 수 있다. 일부 참가자는 동네와 관련된 구체적인 공간도 포함했다. 마당, 골목길, 사랑방과 함께 주민 거점 공간, 미용실, 빨래방, 문방구도 그 예다. 이를 중심으로 청와대의 서로 다른 영역을 엮어주고 시민들의 일상적 이야기가 안팎으로 편안하게 흐르도록 하자. 이를 통해 앞으로의 청와대는 수직적, 권위주의적 이미지를 탈피하고 시민사회와 주민자치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이러한 접근을 선택한 경우 풀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청와대와 시민사회는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소통하고 교감하는가? 국가정책에 대한 주민참여를 유도한다는 명분으로 청와대를 투명하게 만드는 것은 늘 옳은가? 어디까지가 공간의 문제이고, 어디까지가 정책과 시스템의 문제인가? 나아가 동네 공간인 마당과 골목길은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한가? 조언하자면, ‘동네’라는 단어가 풍기는 낭만적 분위기에 취해 그 가능성을 확대하여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또한, 동네의 아름답지만은 않은 현실을 냉철하게 되돌아보는 일도 필요하다. 이를테면 다수의 국내 저층 주거지에서 편안해 보이는 동네 일상은 불법 주차, 쓰레기 무단투기, 겨울철 수도 동파 혹은 불특정 외부인과 다툼으로 인해 종종 파괴되곤 한다. 일부 학교 주변 어린이보호구역에서는 유흥주점 밀집 지구와 범죄 사각지대가 공존하고 있고, 많은 도시재생 사업지에서는 주민참여를 통한 계획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실제 주민협의체에 참여해 계획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일은 전체 거주자 수의 1~2%에 해당하는 주민만이 하고 있다. 각종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곳, 그리고 지역 문제 해결이라는 난제에 대해 대다수 주민이 외면하는 동네의 현실 속에서 소통과 교감의 가능성과 그 한계는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일부 참가자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청와대와 국가권력의 시간성에 주목했다. 그중 일부는 지난 정부의 비극적 폐쇄성을 문제로 바라본다. 왜 지난 여러 정권에서 청와대와 그 주변은 불통과 권위의 상징이 되었을까? 과연 새로운 청와대는 이러한 구습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보다 수평적이고 열려 있는 청와대를 시간의 관점에서 꿈꾸는 작업은 다양한 형식으로 전개될 수 있다. 어떤 참가자는 시간적 병치 전략을 선택했다. 과거의 청와대가 불완전했던 점은 분명하지만, 그러한 과거를 없애버리면 우리는 역사로부터 배울 기회가 그만큼 사라진다. 따라서 과거의 폐쇄적 청와대 공간을 흔적처럼 보존하고, 개방과 소통의 신-청와대 공간을 그 위에 새로운 지층처럼 얹어 놓는다. 이를 통해 청와대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은 과거와 오늘날의 청와대가 얼마나 어떻게 다르냐는 근본적인 질문을 떠올린다. 이러한 접근과는 달리, 전혀 새로운 미래의 기술로 중무장한 청와대를 제안한 참가자도 있다. 이에 따르면 과거의 고리를 끊는 작업은 순수한 건축 형태로 구현되기 어렵다. 그보다는 신기술로 말미암아 가능한 정치참여 방식과 투명한 의사결정 과정을 도입함으로써 가능하다. 따라서 새로운 청와대는 우리 사회의 미래를 집합적으로 결정하는 최신 민주주의 시스템의 공간적 구현이다. 이렇게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고리로서 새로운 청와대를 바라보는 관점은 무척 신선하다. 한발 더 나아간 안도 있다. 왜 우리의 청와대는 한 번 만들어지면 한 장소에 고착되어야 하는가? 선출된 대통령의 임기에 다뤄야 할 주요 사회문제 현안에 따라 5~10년 주기로 새로운 청와대가 조성되고 지난 청와대는 소멸할 수 없을까. 시대 변화에 발맞추어 최소한의 시설과 사람이 이동하고 새로운 거점을 찾는 유목민적 청와대를 꿈꾸는 제안이다.
이러한 시간성보다는 대상지의 위치와 공간적 맥락에 집중한 안도 있다. 과연 국가적 정책 결정을 위한 의사소통은 어떤 입지와 장소에서 잘 이루어질 수 있는가? 적정 규모의 청와대는 무엇이고 그 행정 업무의 효율성 증가는 어떤 공간을 요구하는가? 청와대 주변에는 어떤 행정 서비스나 문화시설이 존재해야 할까? 이 중 다양한 근무자와 방문객의 접근성을 우선 고려한 안은 육상교통과 하늘길이 교차하는 곳에 청와대 입지를 제안했다. 이렇게 새로운 청와대가 자리 잡는데 필요한 여러 공간 조건을 섬세하게 따진 안도 있고, 반대로 청와대가 들어서면 주변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 다양한 변화에 열려 있는 장소를 추구한 안도 있다. 과거의 청와대가 풍수지리적 명당을 찾아 위치했다면, 새로운 청와대는 명당이 아닌 곳을 명당으로 바꾸는 진보적 제안이랄까. 이와 함께 대상지와 관련하여 ‘동네’의 의미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안도 있었다. 과연 이 시대에 동네란 무엇인가? 여러 사람이 더불어 거주하며 평화로운 일상이 펼쳐지는 곳만 우리 동네가 아니다. 이러한 생각을 한 참가자에 따르면 다수의 시민이 출퇴근을 위해 매일 지나가야 하는 한강 다리도 우리 동네다. 혹은 통일 이후의 한반도를 생각하면 국토 중앙부에 위치한 오늘날의 비무장지대(실은 중무장지대에 더 가깝다)도 미래의 우리 동네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동네의 영역을 더 확대해보면 청와대가 위치할 수 있는 대상지는 무궁무진하다.
학생 공모전의 특성상 공모의 취지만 잘 파악하면 대상지 선정이나 프로그램 구성 등에 있어 매우 큰 자유가 주어진다. 모든 참가자가 이러한 자유를 충분히 만끽하길 바란다. 이번 공모전은 허구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지점이 있다. 이는 우리 시대, 한국이라는 시•공간적 현실을 참가자의 상상력과 촘촘하게 이어가는 부분이다. 국가 최고 정책결정자와 그 팀이 일하고 거주해야 하는 공간은 어떤 특질을 가져야 하는가? 이 공간은 어떤 종류의 내부완결성과 함께 주변 도시조직과 어떻게 연계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청와대의 입지와 함께 그 주변 지역은 어떤 변화가 예상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논리적이고 보편타당한 근거로 답을 해야 하고, 이를 공간적으로 명쾌하게 구현해야 한다. 참가자들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