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에 담긴 난망한 상황은 그동안 막연히 혹은 당연하게 생각해 온 ‘우리’라는 개념에 대한 재고를 필요로 한다. 동시에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를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싶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세상과 무관한 내적 완결성을 목표로 개인적인 삶에 매몰되어 각자도생의 사회가 되어버린 지금, 나로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되는 사회적 연결고리나 그 접점을 상실해 버린 것은 아닐까 싶은 의심도 든다. 어쩌면 근본적으로 ‘나’에 대한 사고조차 완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나를 나로 만드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이번 작업은 스스로의 삶과 이야기를 돌보는 것에서 시작하길 권유한다. 무언가에 주의 깊다는 것이 돌봄의 시작이며 그 돌봄 없이는 애정이 생기지 않는다. 각자에 대한 애정의 시각으로 본인이 살고 싶은 삶의 방법과 형태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상상해 보자. 개인은 홀로 완결될 수 없으므로 스스로를 들여다보면 부족한 능력에 대한 자각과 인지가 생기게 마련이며 자연스레 관심은 관계나 연대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은 결국 ‘누구와 관계를 맺으며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에 다름 아니다. 집이라는 장소를 개인에 한정하지 않고 조금 더 확장하면 길, 동네, 도시가 되듯이 돌봄을 개인에 한정하지 않고 서로에게로 범위를 확장하면 관계 혹은 연대가 되는 것이다. 개인의 정체성에 기반하여 각자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느슨한 연대(혹은 연결, 유대, 관계 등등)의 공간을 희망해 본다.
공간은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그리고 물리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관념적 빈자리를 칭한다. 반면 장소는 나를 둘러싼 환경에 관여하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획득한 일종의 터전을 말한다. 앙리 르페브르가 ‘공간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행위와 사물, 환경이 어우러져 생산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가 생각한 공간은 장소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핵심은 ‘공간’이란 생활하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며, 그에 대한 권리 또한 공간의 생산에 구체적이며 현실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통해 정당화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 제도적 형식화가 필요한 것이냐는 별개의 문제이며 충분한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합법과 제도 바깥에도 도시는 숨을 쉰다. 도시를 만들고 구성하는 행위에서 중요한 건 법안을 충족하느냐 아니냐 라기 보다는 사람들이 참여하여 만들고 싶어 하는 도시의 모습 그 자체라는 것이다.
불법에서 해법의 가능성을 찾은 토레 다비드의 거주자들, 무려 40km에 이르는 볼로냐의 포티코, 다가구(다세대) 주택의 계단실에 설치된 렉산 샷시 또는 방수를 위한 옥상의 경량 구조체와 골강판 겹지붕 같은 공간들은 법조문으로 성문화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무엇이 도시의 삶에 적절한지에 대한) 틈새의 감각을 절묘하게 보여주는 결과물들이다. 이러한 감각이야말로 삶의 터전을 공유하고 도시를 함께 만들어가는 근본적인 기초이다.
작고 사소한 건물(혹은 물건)이어도 그것이 도시에 놓이는 환경과 문맥, 그리고 역할에 따라 얼마든지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여기에서 건축(가)의 새로운 역할과 여러 가지 또 다른 가능성을 본다. 기발하고 번뜩이는 창조적 아이디어보다는 세심하고 주의 깊은 실천적인 제안이 필요한 시대이다.
- 심사위원 임태병(문도호제 대표)
퍼블릭아트(공공예술)를 나는 장소, 시간, 사물, 사람을 ‘예술’로 매개해 정동을 발생시키는 일련의 활동과 그 결과로 이해한다. 그 속에서 예술기획자로서 내가 해온 역할은 관객·사용자·수용자·경험자들이 다양한 감각적·신체적·정서적 공명(resonance)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경험 디자이너’에 가깝다. 예술에서 건축으로 개념을 옮겨 보면, 광의의 건축 속 ‘공유’, ‘공동’, ‘연대’와 같은 수식어가 붙는 활동 역시, 공간과 시간을 가로지르며 ‘건축’을 매개로 사용자·수용자·경험자들의 심리적·신체적·정서적 연결을 만들어내는 경험 디자인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동’과 ‘공공’, 그리고 ‘우리’라는 개념을 타자나 별개의 무리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경험과 ‘남’의 경험이 대화와 리서치를 통해 교차하며 그 지점에서 드러나는 모순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러한 모호하고 모순적인 교차성을 즐거운 과제로 삼고, 내 경험과 생각의 조각들을 모아보는 연습, 그리고 도시 안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삶의 형태를 관찰하는 태도 역시 매우 중요하다.
‘우리 어떡해’라는 주제는, 어쩌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가치와 체계가 빠르게 변화하는 오늘의 삶 속에서, 표류하지 않도록 서로를 엮어주는 보이지 않는 ‘돌봄’의 건축적 가능성을 묻는 질문일지 모른다. 이는 땅속 균사체들이 나무의 뿌리를 따라 확장되며 우드 와이드 웹(wood-wide web)을 이루듯, 여러 층위에서 발생하는 ‘서로 돌봄’의 관계망이 우리 삶을 지탱할 물리적 구조를 상상하는 일이기도 하다.
돌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해 가족과 친구, 공동체로 확장되고, 더 나아가 동물과 식물, 그리고 우리의 삶의 근간인 땅까지 이어진다. 결국 우리는 거미줄처럼 얽힌 돌봄의 세계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집에서 키우는 식물을 돌보는 일이든, 공동 과제를 위해 잠시 꾸린 스터디 그룹이든, 길고양이의 물과 밥을 챙기는 동네 네트워크이든, 한 달에 한 번 줌으로 같은 책을 읽고 안부를 나누는 온라인 모임이든, 작은 텃밭을 함께 관리하는 공동 텃밭 모임이든 — 그 형태와 방식, 대상은 끝없이 다양하다.
보니 오라 셔크의 크로스로드 커뮤니티 – 더 팜(1974–1980)은 샌프란시스코의 고속도로 교각 아래 유휴지를 커뮤니티 가든으로 바꾸어, 주민들이 함께 가꾸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누릴 수 있게 했다. 베를린의 스튜디오 올라퍼 엘리아슨이 지속하고 있는 작업 키친(2005년~)은 요리를 공동의 행위이자 감각적 경험으로 확장하여, 아티스트 겸 셰프 아사코 이와마와 베를린 인근의 여러 농장과의 협업을 통한 창의적 메뉴 개발, 구성원 간의 식사와 대화, 팝업 행사와 전시, 세미나 등을 진행한다. 이를 통해 예술을 매개로 기후 변화나 지속가능성 같은 사회적 의제를 사유하게 하는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더 나아가 디지털 플랫폼 Local Dawgs는 금전적 거래 없이 주변 이웃 간 반려동물을 돌보며 신뢰 기반의 상호 돌봄 문화를 형성하는 시스템이다.
이처럼 도시 안에서 상상할 수 있는 돌봄의 형태와 방식, 대상은 무수히 다양하다. 그리고 그 다양성이 넓어질수록 우리가 경험하는 삶과 공동체 속에서 진정한 공명이 발생할 가능성 또한 커진다.
- 심사위원 홍보라(팩토리2 디렉터)
‘나는 어떤 모양으로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은 언뜻 즐거운 상상을 하게 하지만, 막상 건축가로서 이 질문을 대한다면 술술 대답하기 쉽지 않다. 우린 이 질문을 보통 첫 주택 설계를 하게 되었을 때 마주하게 된다. 조금 부끄럽더라도 대담하게 답하고 난 뒤, 점점 나의 삶보다는 내가 속한 사회를 위해 설계하게 되고, 건축가로 성숙해졌을 때는 타인을 위한 삶을 설계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정작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양을 잊고 살기도 한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장소, 문화, 기후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마을과 도시들이 비슷한 양태를 띄게 되고 수천 년간 이어온 다양한 삶의 모습은 잊혀졌다. 이번 기회에 ‘나는 어떤 모양으로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인간은 사회와 떨어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내 삶의 모양이 모여서 도시의 모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다양성의 가치가 커져가는 사회이지만, 과연 건축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는가?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라는 개념이 주는 위화감을 마주하고, 가장 개인적인 것에서 시작하여 도시로 나아가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볼 때다.
집은 사람의 삶과 시대의 모습을 그리는 존재이고, 집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와 평행하게 이어져 왔다. 우리가 그리는 집의 평면이 지금의 시대를 기록하는 기록물이 된다. 2025년의 시대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상상하는 미래, “인간의 상상력의 크기를 느끼게 하는 존재로서의 집, 집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자체가 건축으로 되어 있는 듯한 집”1)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 함께 살 수 있을까?’
‘우리’라는 개념은 ‘나’라는 단일체의 복수형이다. 개개인의 단일체성이 사라진 하나의 공동체가 아니라, 오히려 개별성이 확장되거나 증폭되는 복수화를 거쳐서 더 강화된 상태로 이해해야 한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양이 마을로 확장될 수도 있고, 나와 비슷한 삶의 모양들이 겹쳐있을 수도 있고, 혹은 오히려 서로 다른 모양들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 내가 우리가 될 때 급작스러운 일반화로 인한 중성화의 우를 범하지 말고, 개개인의 성격이 오히려 더 강화되어 새로운 우리의 형태, 나는 누구와 어떤 모양으로 살고 싶은가를 상상해보았으면 한다.
건축은 대지 안에서 완결될 수 있지만, 지어지는 순간 마을에 속하는 존재로서 마을의 일부가 된다. 거주환경은 건축뿐 아니라 그가 속한 거리와 마을 등의 환경 전체에서 만들어진다. 우리가 살고 싶은 삶의 구조가 도시의 구조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서로의 구조를 드로잉해보고 이를 접속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단일체이면서도 집합체적인 성격을 가진, 집과 마을의 중간적인 존재로서의 건축은 어떤 모습일까?
‘건축이 도시를 만드는가’, ‘도시가 건축을 만드는가’라는 인과관계의 딜레마로부터 나와 우리의 상호 관계성을 강화하는 방법을 상상해 본다. 도시의 구조가 건축의 구조가 되고, 이로 인해 구축된 건축이 다시 도시의 일부가 되는 순환적이고 상호교환적인 풍경을 건축하는 것을 통해,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양이 우리가 살고 싶은 모양과 이어진다.
너와 내 삶의 모양들을 인류라는 보편적 관점 안에 적당히 섞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원하는 삶의 모양을 궁극적으로 반영한 건축을 생각해보고, 이 건축이 도시에 놓였을 때,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 살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해 보면 좋겠다.
“집이 개인적인 공간으로서 ‘나’를 확인하게 하는 곳이라면, 건축은 ‘우리’를 만들고 확인하는 곳이다.”2)
- 심사위원 이해든, 최재필(오헤제 건축 공동대표)
1) 류에 니시자와, 「家の建築」
2) 후지모리 데루노부, 「인문학으로 읽는 건축이야기」
“나는 오딘의 아들, 아스가르드의 왕자 토르다.”
“어데 최씹니꺼? 경주최씨 충렬공파 39대손, 현자 돌림!”
과거에 ‘나’를 ‘우리’로 뭉치는 접착제는 혈연·지연·학연이었다. 내가 선택할 수 없고, 한 번 정해지면 바꿀 수 없는 힘. 그렇게 가장 강력한 ‘우리’는 종친회·동창회·향우회였다. 하지만 가족·고향·동문의 점성이 옅어지면서, ‘우리’의 성격이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 이제는 개인이 주도적으로 선택하는 취향 커뮤니티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달라진 오늘날 ‘우리’의 크기와 찰기는 어떻게 변하고 있을까?
전통적 커뮤니티는 클수록 강했기에, ‘찐득한 찰기’를 더해 덩어리를 불려가는 방식으로 성장했다. 반면, 취향 커뮤니티는 알갱이가 작은 ‘‘고슬고슬한’ 커뮤니티다. 취향이 세분화될수록 알갱이의 크기는 더 잘게 쪼개진다. ‘우리 어떡해’를 논하기 전에 각자의 ‘우리’를 감각해 보면 어떨까. 당신의 ‘우리’ 범위는 누구까지인가? 당신이 감각하는 ‘우리’의 적당한 점도는 얼만큼인가?
우리가 세계화의 반환점을 돌아 ‘부족화’로 되돌아간다는 가설을 세워보자. 돌아온 부족민은 부족을 선택하고 떠날 수 있는 자기주도적 선택권이 생겼다. 예전엔 부족에게 버려지면 살아남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부족을 떠나거나 새로운 부족에 들어가는 일이 한결 쉬워졌다. 이제 소속감을 자연수로 고정하지 않고, 소수로 분할하기도 한다. 월, 화, 수 디자인 업무는 수원에서(0.2), 목, 금의 목공방 일은 대전에서(0.5), 여름 한 달 트레일러닝 크루는 장수에서(0.3) 이어가는 식이다. 취향과 관심사의 변화에 따라 커뮤니티는 언제든 붙었다가 떨어지고 분할되거나 재편된다.
누구도 겪어보지 않은 미래 커뮤니티에 대한 여러분만의 가설도 궁금하다. 다만 상상 속 가설의 하중을 견디려면 든든한 리서치가 받쳐줘야 한다. 그 기단 위에 흥미로운 디자인이 올라서야 근거기반 디자인(Evidence-Based Design)으로 현실에 발을 디딜 수 있다.
고향이 아니라 취향을 중심으로 모이는 새로운 ‘우리’는 과거의 ‘우리’보다 훨씬 작고, 한층 가볍다. ‘우리’가 작고 가벼워지면 건축도 작고 가벼워진다. 건물의 크기는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총합과 같다. 고슬고슬한 우리는 피라미드를 원하지 않는다. 건물에 쏟는 돈은 가치관의 지속성과 비례한다. 이동성이 커진 부족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가볍고 산뜻한 건축을 원한다.
커뮤니티가 고슬고슬하고 띠부해질수록 큰 건물, 새 건물의 수요는 줄어든다. 더구나 인구는 줄고 빈집은 늘고 있다. 지방도시에서는 이미 짓지 않는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성장도시 시대에서는 가장 먼저 성장하는 서울이 논의를 주도했다면, 축소도시 시대에는 가장 먼저 축소하는 중소도시가 논의를 주도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지방도시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나? 세계에서 가장 빠른 축소를 경험하고 있는 글로벌 선두주자 지방도시들은 “우리 어떡해?”하며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
작고 가벼워진 건축은 의도적으로 힘을 뺀 적정 건축을 향해 간다. 최근의 프리츠커상 흐름이 말해주듯, 크기와 화려함은 건축에서 더 이상 최우선순위가 아니다. 적정건축은 스트리밍 시대의 음악과 닮아 있다. LP를 사고 정성껏 판을 닦아 음악을 듣던 시대에서, 일상의 일부로 음악이 스며드는 스트리밍 시대로 넘어왔다. 일상 곳곳에서 음악과 동행하자니, 내지르는 고음과 진한 소몰이 창법은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다. 대신 속삭이듯 잔잔하고 힘을 뺀 가창이 선호된다.
건축에서도 화려한 조형의 월드투어 콘서트 같은 건축과 더불어, 일상 곳곳에서 만나는 잔잔하고 힘을 뺀 건축도 필요하다. 건축의 대상도 지금까지 건축가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상가, 인테리어, 리노베이션, 가로, 소공원, 스트리트 퍼니처(street furniture) 혹은 설계를 넘어 시공, 브랜딩, 공간운영까지 확장될 수 있다. 이는 건축이 사람들의 일상에 몇 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다.
렘 콜하스의 S, M, L, XL에 포함되지 않았던 XS 건축은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환경에 부하를 주는 화려한 건축이 아니라, 회수 가능한 초기 투자비용 안에서 실현할 수 있는 저예산 적정건축의 새로운 지도는 어떻게 그려질까?
“우리 어떡해?”라는 묵직한 질문에 폼나는 비전을 제시하기 전에, 막상 우리 건축가들은 앞으로 어떡해야 하나를 고민해야 하는 건 아닐까? ‘우리’의 의미가 바뀌고 ‘짓지 않는 시대’가 도래하는 지금, 건축가는 어디를 바라보고 있나? 삶의 방식과 커뮤니티가 변하는 만큼 건축가의 역할 또한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세상을 리드하며 해답을 내려주는 영웅적 건축가보다, 일상과 고락을 함께하는 다정한 ‘동네 건축가’가 필요한 시대다.
“건축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건축가를 포기했다”고 말한 도쿄 R부동산의 하야시 아쓰미 대표, 『건축하지 않는 건축가』를 쓴 마츠무라 준 박사는 건축가를 포기하지도 건축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근대 이후 고정된 ‘건축’, ‘건축가’의 개념을 재정의하고 확장시킬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 건축가들, ‘우린’ 어떡해야 할까?
- 심사위원 윤주선(충남대학교 교수)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몇 곳의 설계사무소와 인테리어 사무실, 그리고 SAAI건축의 공동 대표를 거쳐 2016년 독립했다. 현재 문도호제 대표로 건축가이자 기획자이며 운영자다. 문도호제는 짓기와 만들기를 넘어 조율하기(기획, 운영, 관리)까지를 건축가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싶어 하는 사무소로 이를 위해 일반적인 건축설계사무소의 시스템이 아닌 인테리어, 시공, 그래픽, F&B, 부동산 운영 등을 담당하는 각각의 팀과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B-hind, D’avant을 비롯한 홍대 지역의 몇몇 카페를 직접 디자인, 운영했고, 이천 SKMS 연구소, 메종 키티버니포니, A.P.C. 홍대, KWANI 플래그십 스토어, 라이브러리 티티섬, 리브랩 등의 건축 작업이 있다. 건국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를 거쳐 지금은 PaTI에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2022 Korea House Vision의 기획위원이기도 했다. 해방촌 해방구, 풍년빌라, 여인숙, 신촌 문화관, 이미집, 현관방의 집 등 몇 개의 작업을 통해 ‘중간주거’라는 가볍고 유연한 새로운 주거 관련 작업을 진행 중이다.
팩토리2 디렉터, 예술기획자. 경복궁 서쪽에서 작은 뾰족한 예술 공간이자 기획 사무소인 팩토리2를 운영하며, 도시·사람·예술의 역동적 관계를 기반으로 국내외 다양한 퍼블릭 아트와 프로젝트를 기획해 왔다. 장르 간 경계를 선이 아닌 넓은 지대로 확장하고자 연구·기획·제작·교육 등 예술과 문화 전반에서 경계 없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에서 예술행정을 전공하고, 시카고시 문화부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퍼블릭 아트 분야에서는 평창문화올림픽 공공미술 프로젝트 Signal Light. Connected, 창덕궁 후원 내 비밀의 소리, 함양 상림숲에서의 라운드프로젝트 등의 아트디렉터를 맡았다. 전시 기획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디자인 기획전 <미각의 미감>, 헬싱키디자인미술관 <Wirkkala Revisited>, 문화역서울284 디자인 특별기획전 <인생사용법>, 한국국제교류재단 북유럽디자인 특별전 <노르딕데이> 등을 기획했다. 또, 21회 밀라노트리엔날레 한국관 예술감독으로 <Making is Thinking is Making>을 기획했다.
단국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건축사사무소 사무소효자동을 거쳐, 동경예술대학 미술연구과 건축전공 석사과정을 이누이 쿠미코 연구실, 톰 헤네간 연구실에서 수료했다. 2016년 동경예술대학 재학 중 「오헤제 건축」을 설립하여, 2017년부터 서울에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주요수상력은 신건축 국제주택설계경기 2007 2등, 동경예술대학 요시다 이소야 수료제작상, 도쿄건축컬렉션 요코미조 마코토상, 일본 SD Review 2017 입선 - 목천의 「세 집」 등이 있다.
건축의 업역을 확장하는 동네 건축가. 건축·도시의 재생과 건축가 개념의 재구축에 관심이 있다. 연구자로서는 ‘보는 연구’가 아닌 ‘해보는 연구’를 지향한다. 2018년부터 ‘잇는 건축가’를 다루는 건축외계(建築外界) 세미나를, 2019년부터 ‘짓는 건축가’를 다루는 DIT(Do It Together) 워크숍을 기획해왔다. 현재 충남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행동하는 도시건축 집단 ‘우당탕탕 Lab’을 이끌고 있다. 동네의 창의적 메이커, 공간 운영자를 존중하고 그들과의 협업을 통해 크고 작은 도시 공간환경의 개선을 추구한다. 공(公)·민(民) ·학(学)연계형 지역관리회사, 택티컬 어바니즘, DIT마을재생, PPP 공공건축 재생, Walkable City, Placemaking 등의 분야에서 ‘설레는 선례’를 만들어가고 있다. 대표적인 현장 연구로 군산 영화타운 재생 초기 기획, 군산회관 PPP형 재생 기획, DIT 공간 재생 시리즈, 대전 동네 건축가 프로젝트 등이 있다.